명품 만년필(756)
명품 만년필
학야록재기중의. 학문을 하면 녹봉이 저절로 따라온다는 뜻에서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. 30대 중반 대학 그 대학을 돌아다니며 기약 없는 보따리장수를 하던 시절을 수없이 되뇌어 본 문구다. 내가 세 푼 팔려고 공부했단 말인가.
그러다가 깨달은 것이 '필야록재기중(筆也祿在其中)'이다. 붓이 안 나오면 밥이 안 나와. 선비가 몸이라면 붓은 용이다. 체는 용을 갖춰야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. 붓이야말로 인류정신의 등불을 후대에 잇는 성스러운 신물이요, 밥이 나오는 생계수단이다. 붉은 핏줄보다 붓에서 나오는 먹줄기가 더 길고 그 영향력의 범위도 훨씬 넓다. 먹이 피보다 진한 것이다.
필자의 만년필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이런 직업적, 그리고 정신사적 배경에서 비롯됐다. 조선시대 명품 붓 가운데 하나는 광주의 '각부필'이었다. 보통 붓보다 45배 비쌌다. 사슴의 등과 배를 연결하는 부분에서 채취한 털로 만든 붓이다. 사슴은 배를 따뜻하게 보호하기 위해 비나 이슬을 맞으면 그 물이 등에서 아랫배로 흘러내리지 않고 땅으로 떨어지도록 하는 특수한 털 구조를 하고 있다. 이 털로 만든 붓이 명품 붓인 진다리 붓이다. 사슴 한 마리당 한 올이 나오고 큰사슴이면 두 올의 털이 나온다. 오래 사용해도 붓 끝이 잘 갈라지지 않고 먹물이 잘 흡수되어 비석에 새겨지는 해서체에 특히 잘 어울린다.
조선시대에 글을 썼다면 모필인 진다리필을 애용했지만 철필 시대로 바뀐 뒤 지금까지 몽블랑의 만년필이 사용됐다.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면세점에서 한 자루씩 구입해 놓고 글을 구상할 때마다 몇 개의 만년필을 책상에 늘어놓는다. 느끼는 대로 이 필저필을 손으로 잡고 있으면 생각이 잘 나. 만년필마다 촉감이 다르다. 어떠한 촉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짐을 느낀다. 최근에는 이탈리아의 명품인 피나이더 만년필을 사용해 보고 있는데, 감촉도 좋고 전체적으로 기품이 흐르는 디자인이 마음에 들고 있다.
기고자:조·윤홍 교수(건국 대학 석좌 교수·문화 콘텐츠학)Copyright♫ 조선 일보(20101018)